전시서문 - 김소은 대표
적도의 낮만큼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녁과 새벽녘에는 식은 바람이 부는 늦여름, 이촌화랑에서는 임하리 작가의 개인전 <소프트 싱크>를 준비했습니다.
임하리 작가는 정물을 그립니다. 물건들이 놓인 공간의 색은 늦은 오후 햇살을 받은 듯 따뜻합니다. 책, 과일, 빵, 컵, 그릇이 놓인 조용한 정물화 사이로 불쑥 요상한 털뭉치가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작가는 이 털 난 덩이들을 ‘털난빵’이라고 이름했습니다.
털난빵은 임하리 작가가 아기를 키우고 관찰하며 창조한 캐릭터입니다. 새끼 고양이 같은 겉모습에 ‘빵!’이라는 외마디로 소통하는 야성의 존재. 그 생김새가 독특합니다. 눈과 입만 덩그러니 있거나 팔다리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한 얼굴은 동물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 즉 ‘몬스터’에 가깝습니다. 아기로부터 나온 몬스터라니, 뜻밖의 연결이면서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조합입니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특히나 공감할 수 있겠지요. 그 괴물같은(?) 귀여움, 천진난만함을.
하지만 그림 속 털난빵은 영화 “에이리언”이나 “괴물”의 축축하고 미끈한 크리쳐가 아니라 “몬스터 주식회사”나 “세서미 스트리트”의 쿠키몬스터처럼 복슬복슬한 존재입니다. 별나고 엉뚱한 모습이지만 그들의 풍성한 털은 궁극의 사랑스러움을 상징합니다. 털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섬세하게 피부의 감각을 자극합니다. 털은 정서적 안정감이며 서로를 어루만지는 친밀한 소통입니다. 털을 가진 존재는 자신과 상대방의 지적, 감정적 격차를 좁혀 어긋남 없는 완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털난빵들은 순간에 충실하고 서로에게 진실합니다. 실제 아기들처럼요. 아기는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친구랑 놀고 있으면서 엄마가 몇 시쯤 가자고 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집에 가다 개미를 발견하면 개미에 온 관심을 쏟아냅니다. 이 순간을 만끽하며 살아갑니다. 아기에게는 지금이 전부이고 지금 함께하는 대상이 가장 중요합니다.
임하리 작가는 이렇게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아기로부터 배웠습니다.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온 마음으로 사랑받길 원하는 아기의 모습은 풍성한 털로 상대를 감싸고 자신의 부드러운 몸을 상대에게 기꺼이 내던져주는 털난빵과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존재입니다.
아기와 털난빵은 모두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과 본능으로 세상과 소통합니다. 그러나 아기들은 털난빵과 달리,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깎이고 두들겨져 연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각’을 잃고 대신 완고하고 뾰족한 ‘세상 감각’을 얻습니다. 아무리 예리한 세상 감각을 가진 사람도 한 때는 아기였습니다. 좋으면 웃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만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소통 천재’가 바로 우리의 본래 모습이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임하리 작가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마음 한가득 ‘털의 감각’을 세워보길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기 뱃살처럼 부드럽고 강아지 옆구리처럼 따뜻한 ‘소통의 감각’, 즉 사랑입니다. 각자의 기억 또는 마음 한 구석에 구겨져 있던 털난빵들을 만나고, 털을 가진 존재처럼 부드럽게 누군가와 온전한 합일(soft sync)을 이루어 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더 따뜻해질 겁니다.
이촌화랑 대표 김소은
Introduction: Note of Invitation - Soeun Kim, Director
Burning summer is passing. In the midst of the late summer breeze, Gallery Ichon presents artist Im, Hari’s solo exhibition, <Soft Sync>.
Im Hari paints still life. The colors of the space with objects feel warm, as if bathed in the late afternoon sunlight. Amidst quiet still life paintings with books, fruits, bread, cups, and bowls placed, a sudden peculiar tuft of fur reveals its presence. The artist has named these furry clusters "Furry Paang."
Furry Paang is a character created by the artist, as a young mother raising a baby. Furry Paang is a wild being, with an appearance of a kitten, that communicates with the exclamation "Paang!" (a pronunciation of the word ‘bread’ in Korean). It has a quite unique form. A face with only eyes and a mouth, an overly large head for short arms and legs. It seems like a creature from another dimension, so-called a ‘monster’. A monster derived from a baby, an unexpected connection that, on one hand, nods in agreement. Anyone who has raised a child would easily empathize. That monstrous(?) cuteness and innocence.
However, the Furry Paang in the painting is not a damp and slimy creature like those in movies like "Alien" or "The Host," but rather a fuzzy presence, like the Cookie Monster from "Sesame Street" or “Monsters, Inc." Despite their quirky and whimsical appearance, their abundant fur symbolizes the ultimate loveliness. Fur is soft, warm, and it delicately stimulates the sense of touch on skin. Fur represents emotional comfort and intimate communication through gentle touch. Beings covered with fur can bridge the intellectual and emotional gaps between themselves and others, forming a harmonious and complete synchronization without discord.
The Furry Paangs, with these attributes, are faithful to the present moment and truthful to each other, much like actual babies. Babies don't regret yesterday or worry about the future. They are indifferent to when their mother will urge them to stop playing with friends and go home. On the way home, if they see an ant, they instantly pour all their attention onto that ant. They live in the moment, savoring it. For babies, the present is everything, and the company they share it with is the most important.
Im Hari learned from her child that the true essence of humanity is to be able to love, trust, and accept someone wholeheartedly. An image of a baby, expressing love with his or her entire body and desiring to be loved with their whole heart, is akin to a Furry Paang that wraps the other with its abundant fur and willingly offers its own soft body to the other. They both embody true love.
Both babies and Furry Paangs communicate with the world through untamed wildness and instincts. However, unlike Furry Paangs, babies gradually lose their tender and soft "sense of fur" as they interact with society, which shaves and beats down their uniqueness. In exchange, they develop a rigid and sharp “worldly sense.” No matter how keen their worldly sense may be, even those with the sharpest sense were once babies. We simply smiled if something felt good, we expressed affection to someone we loved, and we did not hesitate to touch what we liked. We used to be “communication wizards.” That was our original form.
Through this exhibition, Im Hari encourages us to reestablish "the sense of fur" - the tenderness - deep within our hearts. It is the "sense of communication," as soft as a baby's belly and warm as a puppy's flank – in other words, it is love. We wish you to meet your own Furry Paang, tucked away in memories or a corner of your heart, and experience a complete “Soft Sync” with someone, just like the beings with fur. The world will become warmer.
Soeun Kim, Director
기획자의 글: ‘털난빵’에 대한 단상 - 김소은
임하리 작가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진정한 사랑” 저마다 마음 속에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앗, 설마 예쁜 공주와 늠름한 왕자는 아니겠지. “공주+왕자=진정한 사랑”이라는 공식을 20세기 내내 전세계에 퍼트린 디즈니조차 <겨울왕국>(2013)을 계기로 공식을 버렸으니까. 공주와 왕자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한 종류, 하나의 예가 될 수는 있지만 등호(=)로 연결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진정한 사랑은 모성애일수도, 피보다 진한 우정일수도 있다. 누군가는 부부간의 깊은 유대감을 떠올리기도 하고, 아니면 보편적인 신의 은총을 떠올릴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진부한 말에 가려진 의미는 숙고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동화, 소설, 영화 속 러브 스토리는 사랑에 대한 ‘지식’이 될 뿐이다. 그래서인지 임하리 작가는 다른 노선을 타기로 했다. 어떠한 대상이나 서사 아니라 차라리 감각을 전달하는 편을 선택했다.
임하리 작가의 작업 어디에서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을까, 한 번 찾아보자. 하는 순간, 웬 털뭉치들이 보인다. 요상해 보이지만 어딘가 귀엽기도 한, 동물과 인형의 중간계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이 존재는 이번 개인전의 주인공이기도 한 캐릭터 ‘털난빵’이다. 작업 속 털난빵들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상징이자 암시다. 털난빵은 임신, 출산을 거쳐 어린 아기를 키우는 임하리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털난빵은 아기일까? “공주+왕자=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아기=털난빵”은 아니다. 잠시 관객들에게 갓난 아기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더 정확히는, 아기와 교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주 어린 아기에게는 아직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만큼 자연에 완전히 순응한다. (여기서 ‘자연’을 신의 섭리라고 해도 좋고, 우주의 법칙, 세상의 이치, 순리, 뭐라고 불러도 상관 없다. 결국 같은 걸 가리킨다.) 아기는 엄마가 여기 놓으면 거기 놓여진 대로 있다. 배가 고프면 울음으로, 만족하면 웃음으로, 손가락을 내밀면 반사적으로 꼭 쥐고, 말을 걸면 옹알이로 반응하며 순간 순간에 충실한다. 아기는 주변 상황을 멋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난 이 정도 대접받을 사람이 아닌데, 다른 집에서 태어날 걸 그랬군.” “저 친구, 나보다 쟤랑 더 친하다니 실망이군.” 아기는 이런 식의 판단과 해석을 하지 않는다. 눈 앞의 대상을, 주변 상황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지식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를 볼 때 그 편견 없는 순수한 눈에 감동하며 일순간 자유로움, 해방감, 그리고 깊은 평화를 느낀다. 그 느낌은 아마, “아가야, 넌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구나. 너는 온 마음을 다 해 나와 함께하는 순간에 집중하는구나.” 같은 존중감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아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 아닐까?
나는 전시 기획자이기 전에, 아이 엄마로서 임하리 작가의 ‘털난빵’에 깊이 공감했다. 아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통째로 다시 배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나와 함께하고 있는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심지어 책이나 청소기 같은 물건이든. 그렇게 마음을 고스란히 열면 대상과 하나됨을 느끼며 일시적이나마 잡다한 생각으로부터의 해방을 느낀다.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기를 통해 느꼈을 이 느낌을 작가는 ‘털’의 감각과 ‘빵’이라는 의성어에 비유했다. 부드럽고 풍성하고 따듯한 털은 작가의 말대로 공감 능력, 예민한 감각 능력을 의미한다. 곧 온전하고 능숙한 관계 능력이다. ‘빵’은 털난빵들(그리고 아기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면서 모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소리다. 무의미하면서 다채롭고 일차원적이면서 다차원적이다. 사랑을 직접적으로 일컫지 않고 감각에 빗댄 작가의 비유법에 감탄할 뿐이었다.
사실 작가는 아기로부터 배운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털난빵’이라는 모호한 존재를 창조하는 대신에 진짜 아기의 모습을 그려도 됐을 것이다. 쉬운 선택이었을 테다. 하지만 작가는 아기의 실제 모습보다는 아기가 내뿜는 순수하고도 강렬한 존재의 에너지, 사랑, 생명력, 원초적인 호기심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이러한 감각을 살리기 위해 아기를 사실적으로, 인체 해부학대로 충실히 그릴 수 없었다. 그 결과 털뭉치와 같은, 실제 아기와 전혀 달라 보이는 존재가 탄생했다.
정물을 그리던 기존 작업세계와의 연결성도 해치지 않는 선택이다. 임하리 작가는 움직임 없는 대상들 사이에 털난빵을 도입하면서 정물화에 ‘소통의 정서’를 부여했다. 소통은 서로 막힘 없이 오가는 활기이다. 마치 흙으로 빚은 토기 인형에게 숨을 불어넣자 살아있는 사람이 되듯, 정물(靜物)을 정물(情物)로 만들었다. 이렇듯 털난빵은 정물의 한 요소임과 동시에, 정물 그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털난빵을 묘사할 때에도 작가는 멈춰 있는 대상을 유심히 관찰하듯, 선의 표현을 달리 하여 그것이 상징하는 감각을 섬세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회화에서 선(線)의 기본적인 역할은 대상의 윤곽을 나타내는 것이다. 때때로 선은 마치 그 자체가 종이 위에서 춤을 추듯, 보는 이에게 율동감과 리듬감을 주기도 한다. 임하리 작가의 작업에서 사용된 선은 질감과 부피감, 덩어리감, 양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웃한 사물들- 매끈한 과일이나 컵, 꾸덕진 버터케이크 등-과의 이질적인 붓놀림 또는 면을 그린 붓질 함께 보면 털난빵의 털(선)들이 나타내는 질감이 더 뚜렷하게 살아난다.
사랑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신적인 능력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은 신체 능력, 지적 능력, 영적인 능력에서는 신을 따라갈 수 없지만 사랑은 다르다. 사랑을 통해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고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신처럼 말이다. 사랑은 단지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실제적인 에너지다. 임하리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아기가 보내는 사랑의 초음파 덕에 밋밋하게 죽어버린 마음의 털들이 살아났다고 고백한다. 아기들이 우리의 신적인 능력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은, 아직 태초의 순수함을 간직한 존재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소프트 싱크>전을 통해 관객들이 털난빵과 접촉하며, 풍성한 ‘털의 감각’, 잊고 있었던 ‘진정한 사랑’의 감각을 되찾길 희망한다.
<이촌화랑, 김소은>
Preparing for Im Hari’s solo exhibition as a curator, I pondered on 'true love.'
True Love.
Hearing the idiom, each of us would have a certain image that comes to mind in our hearts. Oh, I hope it isn’t something about a beautiful princess and a handsome prince. Even Disney, which spread the formula 'Princess + Prince = True Love' throughout the world for the entire 20th century, abandoned the formula with the release of Frozen (2013). The romance between a princess and a prince can be a type of true love, a single example of it, but not an equal (=) counterpart. True love can be a maternal one, or a bond of friendship stronger than blood. For some, it might evoke a deep connection between spouses, or even the universal grace of a higher power. The authentic meaning hidden behind the cliché 'true love' cannot be discerned through contemplation alone, and love stories in tales, novels, and movies merely become a form of 'knowledge' about love. That is perhaps why Im Hari decided to take a different route. Instead of suggesting another narrative or a subject about love, she chose to convey sensations and feelings that come with love.
“So where in her works could we find traces of true love?”
The moment we peer in, bundles of fur capture our eyes.
Seemingly strange yet somewhat adorable, this being looks like it takes its origin from a realm somewhere between animals and dolls. This character, “Furry Paang,” is the protagonist of Im Hari’s solo exhibition.
The Furry Paangs in the artworks are not virtual entities but rather symbols and suggestions of something real. They originate from the artist’s personal experience of pregnancy, childbirth, and raising an infant.
Then, does Furry Paang stand for an infant? Just as 'Princess + Prince’ does not equal ‘True Love,' a baby does not necessarily mean ‘Furry Paang.’ I encourage the viewer to momentarily envision a newborn baby. More precisely, their own connection with an infant.
A very young baby does not yet have a personality. Because they lack a character, or an ego, they completely adapt to nature. (Here, you can refer to 'nature' as the divine order, the laws of the universe, the principles of the world, order, or whatever term you prefer. Ultimately, they all point to the same thing.) When the mother places a baby somewhere, it stays there. If they are hungry, they cry; if satisfied, they smile. When a finger is extended, they reflexively grasp it; when spoken to, they respond with coos. They remain attuned to each present moment. A baby doesn't arbitrarily interpret a surrounding situation.
"What would others think of me if I do this?
“I’m not someone who deserves this kind of treatment; I wish I had been born into a different family.”
“That friend seems closer to them than to me; how disappointing.”
A baby doesn't engage in such judgments and interpretations. They simply accept the surroundings as they are. Not because of lack of knowledge, but rather their fidelity to the present moment.
Perhaps that is why, when we look at a baby, we are touched by their innocent, unjudgmental eyes, and in that moment, we feel a sense of freedom, liberation, and deep peace. And it might also be a sense of respect such as 'Thank you, little one, for looking at me just as I am. For being fully present with me this moment.' How could this not be the 'true love' that a baby shows us?
As a mother myself, before an art curator, I deeply empathized with Im Hari's Furry Paang. There are moments when I feel like I’m relearning how to understand and live in this world through the perspective of a child. It is giving my fullest attention to the object that is ‘right here, right now’ with me. Whether it's a person, an animal, or even an object like a book or a vacuum cleaner. When I open my heart in that way, I often feel a sense of unity with the object and a momentary escape from fleeting thoughts. One could call it “happiness,” perhaps.
This emotional experience I learned from a child, the artist metaphorically conveyed through the sensory perception of 'fur' and the onomatopoeic word 'Paang.' (a pronunciation of the word ‘bread’ in Korean) The soft, abundant, and warm fur, as the author puts it, symbolizes empathy and keen sensory abilities. Ultimately, it refers to a complete and adept relational skill. 'Paang!' is the sole word that Furry Paangs (and babies) can utter, serving as the magical sound that enables all forms of communication. It is both meaningless and vibrant, one-dimensional yet multidimensional. I could not help admiring the artist’s figurative approach, not directly referring to love, but relating it to the senses.
In fact, the artist could have chosen to depict the true love she learned from a baby by drawing the actual image of a real one, rather than creating the ambiguous entity, 'Furry Paang.' It might have been an easier choice. However, the artist was more interested in capturing the pure and intense energy, love, vitality, and primal curiosity emanating from the baby's presence, rather than portraying its actual appearance. This is why she couldn't realistically and anatomically depict the baby—to bring forth these sensations. As a result, an odd-looking creature with a bundle of fur, vastly different from an actual baby, came into being. It is also a clever choice of connection with Im Hari’s established art world of still life figurative art.
By introducing Furry Paangs amidst motionless subjects, the artist infused a ‘sense of communication' into still life. Communication is an exchange of vibrant energy between each other without obstruction. Just as breathing life into a clay figurine turns it into a living being, she transformed still life (靜物) into emotive objects (情物). In this way, the Furry Paang becomes both an element of still life and holds the potential beyond the constraints of conventional representation.
When describing a Furry Paang, the artist conveys the sense it symbolizes delicately, just as she would carefully observe an object, by using different expressions of lines. In paintings, the basic role of lines is to depict the contours of the subject. At times, lines seem to dance on the canvas as if they themselves are moving, imparting a sense of rhythm and cadence to the viewer. In her works, Im Hari uses lines to convey texture, volume, mass, and quantity. The texture conveyed by the lines (furs) of the Furry Paang becomes even more pronounced when observed with the distinct brushstrokes of neighboring objects such as smooth fruits, cups, or dense butter cakes.
Love is said to be a divine ability bestowed upon humans by God. While we humans may not be able to match God in physical, intellectual, or spiritual capabilities, love is an exception. Through love, we can create life and also sustain it. Just like God. Love is not merely an abstract feeling; it's a tangible energy.
In her artist's notes, Im Hari confesses that thanks to the ultrasonic waves of love sent by her own baby, the lifeless fur of the heart rekindled, breathing new life into it. Perhaps because babies still hold the original purity of the beginning in themselves, they are the great teachers who reawaken our spiritual abilities of love. Through Soft Sync, the hope is for the audience to regain the sense of abundant 'fur texture' and the forgotten sensation of 'true love' by engaging with lovely Furry Paangs.
Curator’s Note: Reflections on Im Hari’s “Furry Paang” - Soeun Kim
전시 서문 - 박소호
#수련을 위한 그리기정물화는 대게 수련을 위한 그리고 수행의 대상으로 이어져 왔다. 물론, 시대적으로 그 역할과 의미가 다르게 여겨졌다. 창작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회화의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을 열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입시 미술에서 정물은 그리기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구성에서부터 주제와 부주제를 선정하고 채색하여 완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준과 채점방식을 적용하여 점수를 부여한다. 정물이 그리기 학습에 유리한 점은 실내에서 가능하다는 점과 비교적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물 그리기는 자연스레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과거의 어떤 부호가 주문한 정물그림에는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 즐비하고, 가난한 화가가 수련을 목적으로 그린 그림에는 낡은 장화가 등장하여 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문명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소재가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현재는 SNS라고 하는 모바일 환경에서 시대의 모습을 잘 관찰할 수 있다. 이제는 그림을 그릴 필요 없이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각자의 모바일 기기에 일상의 정물을 담아낼 수 있다. 특정공간에 전시하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도 있다. 또한, 그림 그리는 AI의 등장으로 인해 화가의 화풍, 매체, 소재 등 상당히 많은 요구사항을 반영하여 놀라운 정도로 신속하게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전보다 빠르고 쉽게 이미지를 만들고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하드웨어의 소유, 소프트웨어의 공유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쉽게 만들어진 만큼 인간이 이미지 생산에 가하는 영향력은 크지 않다. 작가 임하리의 고민은 바로 이지점에서부터 출발되었다. 시대를 가장 자연스럽게 반영할 수 있는 매체로써의 정물화, 기술이 개입하게 되어 얻는 이미지에 의문을 가지고 의도가 상실된 이미지, 즉, 껍데기만 남은 정물과 오브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는 텍스트를 입력하면 이미지를 생산하는 ‘text-to-image’와 구분되는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인간의 손에서만 표현되고 창작될 수 있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그림의 현장을 언급한다.
#결국, 현장
작업실은 창작자의 흔적으로 가득 채워진 그야말로 유기체, 일종의 성격이 부여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완성되는 작업이 쌓이고 물건이 늘어나고 버려지기를 반복하면서 작업실의 모습도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일상의 공간과는 다르게 그 성격과 색이 깊게 베어 들기 마련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예술공간 의식주라는 전시공간, 작품이 고정되고 관람되는 곳을 자신의 작업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림이 보관되는 저장소, 여러 가지 스케치와 아이디어가 자라나는 연구소, 그리고 지속적으로 작품이 그리고 지고 완성되는 그림의 현장 등 세 가지 공간으로 구성했다. 저장, 연구, 진행의 공간을 전시장에 연출하여 과정 자체를 드러내는 프로젝트로 만들어냈다. 결과 뒤에 숨어있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일종의 무대를 설계했다. 이 무대 위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부터 시작한 현장을 그려낸다.
#바로, 이 순간
알고리즘이 만든 결과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모두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구성되어 있다. 어떠한 드라마틱한 전개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대를 향해 뻗어 나아가는 이 숫자의 조합은 인간이 원하는 시청각 자료를 생성하여 욕망을 충족하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적 작용과 대입은 배제되어 명령과 복종이라는 주종관계만 성립될 뿐이다. 작가 임하리는 이 주종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인공지능에게 단어를 던지고 질문하면서 얻은 이미지에 물리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2차 편집을 진행한다. 이는 인공지능이 담고 있는 공동의 목적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인간이 가진 편의와 욕망을 충족하고 채우기 위해 작동하는 AI, 임하리는 캔버스와 물감과 더불어 매체로써 AI를 이용한다. 명령과 복종으로 만들어지는 디지털 이미지에 의문을 던지며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 인간이 할 수 있는 진행형의 회화에 주목하고 그 현장을 제안하고 있다. 패턴화 되고 한 방향으로 구현되는 알고리즘의 이미지와 구분되는 의지와 선택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현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 여기’를 반영하기 위해 도구로써 정물과 알고리즘의 이미지를 활용한다. 이를 통해 ‘새로움’으로 지칭되는 관습과 강박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만 생성될 수 있는 ‘유일한 회화’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그가 정의하는 유일한 회화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이 유영하는 이 세계에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이 순간’에 있다.
전시 서문 - 김치현 큐레이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일상에서 촬영한 디지털 사진첩 속 잉여 이미지를 그려낸다. 인터넷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공유하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가로보다는 세로로 길거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시대 사람들이 다른 광경을 발견하기 위한 행동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위아래로 문지르고 마우스 스크롤을 굴리는 모습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짤막한 알림과 함께 몇 초간의 빛을 발하고 화면 맨 위에 나타날 때 마다 지난 이야기는 화면 아래로 가라앉는다.임하리의 작품들 역시 인터넷 소셜 미디어에서 순식간에 소모되는 이미지와 닮은 정사각형과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프레임을 갖는다. 또한 화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형상은 공통적으로 화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작품이 초점을 간단하고 신속히 조정해야하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된 일상 속의 사물의 재현이며 대상을 작은 화면으로 바라보던 당사자 개인에게만 잠시 흥미로운 이미지였음을 확고히 한다. 작가의 스마트폰 속 사진첩에서 선정된 이미지들은 얼핏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사물이나 순간 일 수 있지만 도리어 기기의 저장 공간의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버려지는 삭제대상일 수도 있다. 작품 속에 보이는 형상들은 구체적이지만 식별에 필요한 만큼만 친절하게 묘사되었다. 작품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돌은 당시의 의도가 잘 기억나지 않는 지난 사진들의 무의미한 연속처럼 화면을 구성하는 다른 사물이 지닌 특정성을 약화시킨다. 역시 필요한 만큼만 그려져 있기에 돌의 뜬금없는 존재는 관객으로 하여금 과거의 정물화로 이야기 되곤 했던 작품에 담긴 교훈이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금세 식어버리게 되는 가벼운 흥미 섞인 의문을 유발한다.
붓의 결이 드러나는 빠르고 건조한 스트로크는 캔버스의 표면이 미약하게 드러나기도 하면서 물감의 불투명하지만 얇은 두께와 함께 빠르게 소모되는 디지털 이미지가 가졌던 표면적인 특성과 맞아떨어진다. 작품들은 정적인 분위기와 미묘하게 어우러지는 차가운 온도를 지니고 있지만 냉소적인 태도는 아니다. 단풍은 아름다웠지만 떨어진 낙엽은 결국 치워 버려지게 되는 먼지이다. 그림에는 본질이 휘발되고 껍질만 남은 이미지에 대한 집착을 오롯이 떨쳐내진 못해도 덜어내고 싶은 작가본인의 자조적인 숨결이 담겨있다.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대단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빗자루로 쓸어내듯 묵묵히 붓으로 캔버스 표면을 문지른다.